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버트 후버 (문단 편집) === 대통령 취임과 [[세계 대공황]] === >'''"What the hell has [[허버트 후버|Hoover]] got to do with it? Besides, I had a better year than he did." ''' >'''[[http://www.baseball-almanac.com/tsn/babe_ruth_salary.shtml|"내가 요구한 연봉이 허버트 후버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게다가, 내 올해 성적은 그 자보다 낫소."]]''' >---- >ㅡ [[베이브 루스]], 1930년에 연봉 8만 달러가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연봉이 7만 5천 달러였고, 미국은 막 [[대공황]]의 불황으로 접어든 상태였다.[[http://www.baseball-almanac.com/tsn/babe_ruth_salary.shtml|#]]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 대공황은 후버만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고, 경제 방향적으로 감이 없던 전전임 하딩과 전임 쿨리지 행정부 시절부터 오랫동안 쌓였던 것이 후버의 대에 터진 것이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딩 때부터 후버 초기까지 재무장관으로 재임한 [[앤드루 맬런]][* [[피츠버그]] 출신의 은행가로 [[카네기 멜런 대학교]]의 창립자 중 하나다.]은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로 인해 여유자금이 생긴 기업들 사이에 재테크 열풍이 불면서 주식시장에 돈이 몰려 활황을 가져왔지만, 주식이 영원히 오를 수는 없었던 데다 주식시장의 거품이 과열되는 와중에도 이를 연착륙시킬 대책은 미비해서 사실상 거품은 방치되었는데[* 사실 앤드루 맬런도 주식시장의 거품에 대해 우려는 하고 있었지만 너무 늦게 대응했다. 게다가 그 처방이랍시고 나온 구조조정 작업은 뭔가 현 상황의 타개책이랑 핀트도 잘 안맞았고 오히려 미국 경기까지 후퇴시켰다.], 결국 그것이 후버 대에 터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후버로서는 자기만 모든 사태의 주범인냥 욕먹는 점이 억울할 법도 한 부분이다. 하지만 후버 정권은 이에 대한 후속 대책에서 무능함을 보여주는데, 주식시장에 투자한 개인이나 기업이 '''한둘이 아닌 만큼''' 수많은 기업, 개인들이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고 은행도 동시에 타격을 받았으며 공장은 문을 닫아 주식에 투자하지 않았던 노동자들도 실업자가 되어 상인과 농민들도 수입이 크게 줄어든 판국에, 후버와 그의 참모들은 이런 상황을 시장과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낙관론만 펴며 사실상 방치했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시기에는 '''기존의 경제 이론들이 죄다 그런 식이었다.''' 미국 경제 대공황의 원인은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지만, 어쨌든 발생 직전에도 과열되어있던 주식 시장을 보면 이미 전조는 충분히 드러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허나 후버 행정부는 경기 과열을 예측하고 있었음에도 초기의 몇몇 땜질 정책이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는 결국 경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오고 만다.] 후버가 나서서 '''"이 불경기는 2개월이면 끝날 것입니다."'''라고 장담했지만 그의 장담과는 달리 경제 상황은 2개월은 커녕 2년 이상이 넘도록 계속 악화되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세의 법칙]]이 정설이었고(즉 1차대전이 끝난 시점까지도 공산품 수요가 생산을 앞지르고 있었다 봐도 좋았다. 후버는 본격적으로 폭발한 생산력이 수요를 초월하는 사태에 1번 타자로 나서야 했고.), 더 나아가서 대공황이라는 단어는 당시 경제학의 이론에서는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개념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케인스 학파가 학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유효수요라는 개념 역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파일:external/ephemeralnewyork.files.wordpress.com/centralparkhooverv.jpg]] [[1930년]] 1월의 후버 마을. 이곳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다. 결국 공황이 수습될 것이라고 했던 후버의 장담과는 반대로 12월에는 오히려 실업자가 1백만 명을 돌파했고, 임기 3년째가 된 1932년에는 '''1,300만 명'''을 돌파하고 말았다. 자연히 실업자들로 이루어진 빈민층이 거리를 메웠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판자집을 세웠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후버마을(Hooverville, 후버빌)'이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다. [* 이 후버 시리즈가 좀 있는데 예를 들면 후버 모포(Hoover blanket, 신문지 덮고 잠자기), 후버 깃발(Hoover flag, 텅빈 주머니를 바깥으로 꺼내놓은 상태), 후버 가죽(Hoover leather, 밑창 떨어진 신발을 종이로 땜빵해서 신고 다니기), 후버 차(Hoover wagon, 기름값이 없어서 엔진 때놓고 말이 끌고 있는 자동차)등이 있었다. ] 이 와중에 후버는 그간 쌓아 온 평판을 제대로 땅바닥에 내던지는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바로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제대 군인들이 혹독한 불경기를 겪게 되자 [[1945년]]에 지급 예정이었던 군인연금 보너스를 미리 달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된 이 사태는, 제대 군인과 그 가족들이 포함된 2만5천여 명의 인파가 [[워싱턴 D.C]] 남서부의 아나코스티아 강변으로 모여들어 쓰레기장에서 주어온 잡동사니로 판자집을 만들어 야영지를 세우고 농성을 벌이는 상황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헌데 당시 언론과 정부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체제를 위협하는 [[빨갱이]]들이라고 매도하였다.[* 이 공산주의 드립은 정말 심심하면 튀어나왔는데,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 등지로 간 가난한 사람들(이른바 '오키(Okie)'라고 한다)에게도 써먹었다. 일은 엄청나게 시키면서 임금은 쥐꼬리만큼 주는 데 화가 나서 대항했는데,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몰아간 것. <분노의 포도> 후반부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매카시즘 열풍때 최정점을 찍는다.] 이에 후버는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고, 맥아더는 그의 부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지 S. 패튼]] 소령의 휘하에 있는 제3기병대에 명령해 [[탱크]]를 선두로 보병 1개 연대와 기병을 착검돌격시켜 [[보너스 군대]]가 머물던 판자촌을 쓸어버렸다. 전차 6대를 이끌고 판자촌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친 것이다. 전쟁의 미친 개로 불리던 패튼[*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조 안젤로(Joe Angelo)라는 병사의 일화가 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패튼의 목숨을 구해준 업적 등으로 인해 패튼에게 "용감하다"라고 칭찬받은 군인이었지만, 민간인으로 돌아온 뒤 대공황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 보너스 군대에 참가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패튼을 설득하러 갔을 때 패튼은 "난 이 새끼 모르니까 당장 쫓아내라"며 문전박대했다. 패튼은 후에 "내가 그 새끼 전쟁 이후에 돈도 대주고 얼마나 잘 해줬는데 뒤통수 친다"하고 투덜거렸다고 한다.]이 시위 진압에 동원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막장이다. 전술했듯 맥아더는 정부의 프로파간다를 충실히 따라 보너스 군대는 '''공산혁명'''을 추진하려 하고 실제 퇴역병은 1할밖에 안될 거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조사한 결과 보너스 군대의 95%가 실제 퇴역병과 그 가족이었다고 밝혀졌다. 어쨌든 이 여파로 5명 이상의 '''사망자'''와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진압군 측에서도 60여명의 부상자가 났다. 후버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평화적 해산을 맥아더에게 주문했지만, 맥아더는 명령을 무시하고 시위대를 몰아낸 다음 판자촌을 싸그리 불태우며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후버 입장에선 빡칠만한 일인데, 정작 맥아더는 후버를 나쁘게 보진 않았는지 노년 대담에서 "그래도 후버는 나쁘지 않았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 강제 해산된 보너스 군대는 겨울 내내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이 사건의 여파로 맥아더는 예편되고 한직인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가게 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FDR]]이 취임하자 이들이 다시 워싱턴에 집결했는데, 루즈벨트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당장 지급 대신[* 루스벨트도 보너스 지급은 정해진 기간에 줘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뉴딜 정책에 퇴역군인들을 참여시켜 불만을 누그려뜨렸는데, 1935년 이들이 일하던 지역에 허리케인이 강타해 많은 퇴역군인들이 피해를 입자, 다시 한번 미국 사회에서 동정론이 일어 1936년 의회 주도로 조기 지급이 이뤄지긴 한다.] 뉴딜 사업에 이들을 합류시켜 일자리를 제공한다. 덕분에 세간에선 '후버는 군대를 보냈고 루스벨트는 아내를 보냈다'며 비교대상이 되기도 했다. [[http://shock009.egloos.com/v/2135415|보너스 원정대(Bonus Expeditionary Force)에 대한 이야기]]. 여하간 후버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국가의 군 통수권자로써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 당연히 비판거리가 되었고, 오히려 여론은 후버를 퇴역군인의 생활에 대해 무감각한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후버의 대선후보 적수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시 하버드 법대 교수이자 훗날 연방 대법원장을 지내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에게 씨익 웃으며 "그렇군요, 펠릭스. 이번 선거는 저를 선택할 겁니다."라 말했다고 한다. 결국 언론과 대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취임한 대통령이 그 언론과 대중에게 나라 경제를 거덜낸 원흉으로 취급받고, 퇴역군인 무력 진압 탓에 대통령으로서의 위신마저 땅에 떨어지게 되자 후버는 뒤늦게나마 일부에서 여러 조치를 취한다. 엄청난 국가 예산을 풀어 부도 직전의 기업에게 나누어 주고 [[소득세]]를 인하했으며, 일자리 제공을 위해 공공근로사업을 발주시켰다. 그래서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때의 조치가 루스벨트 때에 빛을 보았다라는 시각도 보이지만 솔직히 타이밍도 많이 늦었고, 부화뇌동스럽기도 했다. 조치를 취하긴 했어도 계속 경기악화가 이어진지라 결국 [[1932년]] 대선에서 자신이 당선될 때보다 더한 [[관광]]을 당하며 루스벨트에게 [[백악관]]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리고 이후 공화당은 2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야당으로 보내게 되며, 1994년 공화당 혁명 이전까지 쭉 하원 다수당이 되는데 난관[* 1932년 후버의 퇴임 이후 부터 1994년 공화당 혁명까지 62년, 서른번이 넘는 하원 선거 동안 2차 대전 직후의 피로감이 표출된 1946년과 한국전쟁으로 대두된 반공주의와 인기 있는 새 대통령 아이젠하워 덕을 본 1952년을 제외하고선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된적은 없었다. [[뉴트 깅리치]]의 뒤집기 이전까지 공화당은 다수당을 노리기는 커녕 민주당이 단독으로 법안을 상정할 수 있는 기준선인 260석을 막는데 급급했을 정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압승을 거두었던 1972년의 닉슨과 1984년의 레이건도 공화당이 하원 과반을 차지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을 겪었다. [[파일:Davidson-Sorkin-Transition-From-Hoover-to-FDR.jpg]] 1933년 대통령 취임식 직전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악수하는 모습. [* 이제 퇴임할 전임자의 악수를 앉아서 받는 모습이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때 루즈벨트는 소아마비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